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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바위와 남이포

작성일
2017.01.20 09:42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590
첨부파일(1)
남이장군의 전설이 깃든

옛날 조선 중종때 지금의 연당1리[蓮塘一里 : 옛 석백리(石白里)의 속칭 돌백리] 석백지(石白地) 가에 아룡(阿龍)과 자룡(子龍)이라는 형제가 살았다.
이 아룡과 자룡 형제는 원래 석백지의 지룡(池龍)의 소생으로 지용(智勇)이 뛰어났으나 일찍부터 흉계를 품어 역모를 꾀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원래 아룡과 자룡은 신용(神勇)이 있어 누구라도 감당할 자가 없어 저들이 성세를 떨친 지 오래도록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 소식이 당시 관중에 들어가자 조정에서는 묘의(廟議) 끝에 무용(武勇)이 절륜(絶倫)한 남이 장군[南怡將軍 : 의산군(宜山軍) 남휘(南暉)의 자(子)로 태종의 외손, 관(官)이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되 28세에 원사(寃死)함. 추증 충장공(忠壯公)] 일등공신에게 토벌령(討伐令)을 내렸다.
남이 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서 아룡과 자룡을 토벌할새 이들을 지금의 선바위 앞 강변으로 유인하여 양군(兩軍)이 대결하여 싸우게 되었다. 이때 관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자 우선 양군 장군이 검술로 대결하게 되었다.
이에 양군 주시속에 남이 장군과 아룡·자룡이 출전하여 검술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승패가 없었으나 차차 이합 삼합으로 들어가자 양편의 검술은 묘경이어서 보는 사람들도 점차 정신을 빼앗기게 되었다. 교봉(交鋒)이 더욱 치열하여지자 양편 장군은 점차 몸을 날려 공중으로 떠올라 가면서 검기(劍技)를 다툴새 섬섬(閃閃)한 검광만이 하늘에 비쳐 번쩍일 뿐 점차 사람은 아득하여 보이지 않고 공중에는 장시간 칼소리만 쟁쟁하게 울려올 뿐이었다. 바라보는 양군의 군사들은 몸에 땀이 배었다. 차차 칼소리가 멎어지자 아득히 공중을 바라보니 아룡과 자룡의 목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관군측에서는 크게 함성이 일어나고 환성이 터졌다.
이에 개선한 남이 장군은 늠름히 공중에서 내려오는 길에 대안(對岸)의 석문석벽(石門石壁)위에 검을 휘둘러 칼끝으로 자기의 초상을 석벽에 새기고 내려와서 그 도중(徒衆)들에게 항복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양군이 대전하던 이 계포(溪蒲)를 후인들은 ‘남이포(南怡浦)'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높은 석벽을 쳐다보면 각(刻)이 뚜렷이 보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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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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