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의 지리와 물산
- 작성일
- 2017.01.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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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는 흔하고 햇빛은 귀하다.
영양군은 남쪽에 이웃한 청송군처럼 교통이 불편한데다가 내륙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 ‘육지 속의 섬’ 으로 불리는 외진 고장이다. 남쪽으로 청송군과 만나는 이 군은 동쪽으로는 영덕군과 울진군, 서쪽으로는 안동군, 서북쪽과 북쪽으로는 봉화군과 만난다. 강원도에서 봉화군을 거쳐 내려와 이 군으로 들어온 태백산맥은 봉화군과의 경계에 높이 1,218 미터의 일월산을 세워 놓고 거기에서부터 군 안의 동남쪽으로 울련산, 오십봉, 주산, 수산 같은 높이 800미터 안팎의 산들로 이루어져 백암산맥을 하나 흘려 놓고 남쪽으로 내려간다.
백암 산맥은 서쪽으로는 낙동강, 동쪽으로는 동해를 찾아가는 하천의 분수령을 이룬다. 일월산은 철령에서 내리닫는 태백산맥이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에 이어 마지막으로 높게 세운 큰 봉우리로 그 둘레가 백리에 이른다. 동쪽으로 동해가 바라보이는 봉우리에 해와 달이 솟는 것이 먼저 보여 일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음력 3월 까지도 흰 눈이 녹지 않는 이 산은 밥취, 금죽, 참나물, 고사리 같은 산나물이 많이 나고 산삼이나 복령, 송이, 잣, 꿀도 난다.
이 산의 서쪽인 일월면 도곡동 월간 마을에서 발원한 하천과 동쪽인 일월면 용화동의 기슭에서 발원한 하천이 남쪽 도계동에서 만나 반변천을 이룬다. 이 반변천은 새로 흐르면서 이 군의 곳곳에 작은 평야를 만들고 청송군 진보면에서 청송천의 물줄기와 만나 안동군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영양군은 앞서 말한 대로 고원지대에서 함경남도의 고원 도시인 북청 지방과 거의 같은 시기에 서리가 내린다. 군의 북부 지방인 수비면, 일월면, 청기면 일부에 첫 서리가 특히 일찍 내리는데. 대개는 시월 초순에 첫 서리가 내리고 마지막 서리가 내리는 때가 사월 하순까지 뻗치기도 한다.
그러니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은 180일 안팎이다. 눈이 더디게 녹아 해동이 늦은데다가 해가 비치는 시간도 산악에 가려 짧다. 그러나 한여름인 칠팔월에 한해의 강우량의 50퍼센트가 집중되므로 맑은 날씨는 많은 편이다.
팔월 초순이면 영양 산천이 붉다.
영양군은 전체 넓이 814.7 평방 킬로미터의 87퍼센트가 임야이고 밭이 그 7퍼센트이고 논는 그 3퍼센트에도 못 미쳐 경지 면적이 퍽 좁다.그러나 예로부터 영양군에는 고추 재배가 성했다. 이 군의 고추 주산지는 청기면 북부 지방으로 대표되지만, 이 군의 어는 곳에서나 부지런한 일손으로 가꾼 고추밭이 산꼭대기까지 펼처진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영양읍 상원동은 예로부터 고추가 많이 생산되어 “무들이, 당평 처녀들 고추손이 매워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무들이’와 ‘당평’은 상원동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껍질이 두꺼워 빻으면 가루가 푸지고 국물에 넣어도 가라앉지 않아 경제적이며 매우면서도 단맛이 있다는 영양 고추는 서울 상인들이 한금 더 쳐주는 이름값을 누리고 있다. 1981년에 영양군의 고추 재배 면적은 2,172 헥타아르로 경상북도 재배지의 10퍼센트를 차지했다. 품종으로는 청기변 토구동이 원사지라는 칼초와 별초를 가장 맣이 선택하는데, 같은 해에 갈초가 재배 면적의 45 퍼센트를, 별초가 15 퍼센트를 차지했다. 8월 초순이면 고추 수확이 시작되고, 수확된 고추는 건조실에서 하루 남짓하게 말린 다음에 햇볕에 내어 빛을 낸다.
이때는“영양 산천이 붉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출하 시기는 9월, 10월, 11월의 석달 동안이다. 1978년처럼 고추값이 좋았던 시절에는 농민들이 고추를 지고 갔던 지게를 택시 뒤에 매달아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다음의 이태 동안은 그 값이 폭락했고 1981년에도 그 값이 생산 비용에 못 미쳤을 뿐더러 흉작까지 겹쳤다. 유난했던 가뭄 속에 십리도 더 떨어진 산 아래 냇물에서 물을 길어다 고추 포기마다에 물을 주어야 했던 고추 농사꾼들은 물가는 해마다 올라가는데 제라리 걸음도 못하는 고추값을 크게 걱정하였다. 영양군은 밭농사의 산물로 고추말고도 잎담배가 이름있다. 이곳의 특산물로 담배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삼백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거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조건 숙종때에 지금의 청기면 구매동에 살던 박명순이란 농부가 안동 진압루 앞에서 담배를 팔았으나 다른 지방 사람이 다 팔고 갈 때까지 혼자만 못 팔고 남았다고 한다. 화가 난 그는 누각에 올라 “발매, 구통- 발매와 구통은 구매동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박명순네 차조 밭머리 담배 맛 좀 보아라"고 외치며 담배를 죄다 길 위에 흩어 버렸다고 한다. 길 가던 이들이 주워서 피워 보고 맛과 향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게 됐는데 이때부터 영양 담배가 알려져 전매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전국 시장에서 인기있는 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칠십년대부터 고급 담배라는 휙스가 주로 재배되어 수출되고 있다. 이 군의 사천 가구쯤이 2,3000 헥타아르쯤에 담배를 심어 한해에 사백오십만 킬로그램을 생산하는데, 그 대부분이 휙스이다. 1980년 한 해 동안에 영양군의 농업 생산액 이백 몇십억원쯤 중에 고추로 번 돈이 백사억원으로 절반이 넘었고, 담배로 번 돈이 사십팔억원, 쌀과 보리로 번 돈이 사십륙억원, 고냉지채소로 번 돈이 이십칠억원이었다. 영양군의 깃발에 담배잎과 고추의 그림이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다.
울고 넘던 울팃재
영양군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판도에 들어가 신라 중기부터 고은군으로 불리다가 말기에 영양이 되었었다. 고려에 와서는 1018년인 현종 9년에 지금의 영덕군 영해면에 있었던 예주부에 속했다가 1179년인 명종 9년에 영양현이 되었다. 이때에 세웠던 관청 건물은 1358년 공민왕 7년에 영해의 남쪽 섬인 축산도에서 상륙하여 영해, 영양, 청기, 예안, 순흥, 단양, 제천 까지 쳐들어와 노략질한 왜구가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불태웠다고 전한다. 영양현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1413년인 태종 13년에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개편할 때에 청기현과 합쳐진 뒤에 관청이 없이 영해 도호부에 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에는 때때로 있었던 군사 훈련이나 납세와 공무를 위해 주민들이 영해까지 가야 했다.
그런데 영양 지방에서 영해로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는 팔십리, 먼 곳에서는 백리 길을 걸어가야 했고 게다가 험한 산길인 울티재를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영양주민의 고통이 이만저만한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월산에서 산세를 이어받은 높이 1,004 미터의 백암산이 다시 동쪽으로 뻗어 영양과 영해 사이에 이루어 놓은 이 재는 울티라고도 하고 한자 이름으로 읍령이라고 하는데 눈물을 흘리는 고개라는 뜻이다.
봄과 가을에 곡식을 관청에 바치려고 호랑이와 도둑이 들끊는 이 길을 넘어가던 영양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고 또 이런저런 까닭에 울며 넘었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같은 영양군 안에서도 지금의 청기면에서 영해로 가려면 영양과 청기 사이를 가로막은 행곡령을 넘어야 하는데 그 이름도 ‘울며 간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1633년인 인조 11년에 이곳 주민들이 현을 이곳에 설치해 달라고 진정하는 소를 올려 1676년인 숙종 2년에는 현을 설치하기도 했으나 인구가 적어서 곧 취소되었고 1683년에 가서야 영양현으로 따로 떨어져나갈 수가 있었다. 임진 왜란 뒤에 점차로 인구가 불어남과 함께 시작됐던 현 설치 운동이 쉰해 만에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때의 영양현 땅은 지금의 영양읍, 일월면, 수비면과 청기면의 일부였다. 1895년에 영양군으로 승격했는데 1914년에 진보현에 속했던 입암면과 석보면이 옮겨와 면이 여섯개가 되어 비로소 군으로서 면모를 갖추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 온정면 본신리가 이군의 수비면에 들어왔다. 이 군의 영양면이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79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름만 고쳐졌을 뿐이지 크게 달라진 것은 찾아 보기 어렵다. 영양군의 인구는 1972년에 68,582명이었으나 점차로 줄어들어 1980년에는 52,903명이 되엇다. 같은 해에 이 군은 인구의 68퍼센트가 농가 인구였는데, 경상북도에서도 농사를 짓던 집이 가장 많이 비어 있는 군으로 꼽혔다. 지금도 영양 지방에서는 “당대에 타관에서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으나 당대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말을 들을 수가 있다.
아마도 옛날에 성했던 풍수지리설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많은 주민이 바깥에서 들어와 정착하기도 하지만 생활 기반이 다져지면 곧 뜨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도끼 맛을 보지 않은 울창한 원시림이 있었고 산나물과 약초가 절로 나며 산지를 개간하면 콩이나 고추나 담배를 심어 생계를 장만하기가 쉬운 곳이므로 바깥 사람이 많이 들어왔으나 한편으로 거기에서 더 발전하기도 어려워서 당대에 떠나는 이가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뭏든 이 군은 팔십년대에 들어서도 철도도 없고 포장된 도로도 없고 변변한 공장도 없는 정체된 고장으로 남아 있다.
「에새이 노래」가 말해 주는 것
「영양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이 교통이 불편하고 흉년이 잦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을 때가 많았으나 조선 숙종 때에 현이 부활된 뒤에 이웃인 안동과 예안의 유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글을 숭상하게 되었고 주민의 성질이 소박하면서도 인내력이 있다”고 하였다. 1963년에 일월면에서 한국학 대학원 교수 조동일 씨가 채집하여 「경북민요」에 수록한 예순이 된 한 나무꾼의 「어새이」란 노래는 예 영양 주민들이 일구어 온 생활의 한 모습을 전해 준다.
"얼시구나 남 날 적에 나도 나고 내 날 적에 남도 났건만/ 어떤 사람 팔자 좋아 책상 밑에 앉아서 호의호식하고 팔자 좋게 지내지마는/ 어떤 사람 팔자 좋아 겨울이면 뜨신 방 찾아/ 각장 장판 소로 반죽에 이불 담요 피어 놓고 포시라이 놀건마는/ 나는 어이하여 팔자가 기박하여/ 육날이 미투리에다가 목발 없는 지게에다/ 썩은 새끼 지게꼬리에다 황경피 낫잙에다 지게 꽂아 짊어지고/ 산천을 후워보니 눈은 설산 가산한데/ 쳐다보니 만학이요 내려다보니 절벽이다/ 양지짝 쳐다보니 바끔한 곳 한 곳 있어/ 올라가 찾아보니 노루 누었던 자리로다/ 지게 꼬리 괴어 놓고 낡을 하자 생각하니/ 손은 시러 생각이요 발은 시러 뻐챘도다/ 나무할 곳 없네/ 어이어이 어이어이 내 신세야/ 나의 신세 이리 될 줄은 어떤기 누구 알았실고,"
나무꾼이 생계를 위해 이렇게 신세를 한탄하며 고생하고 헤매던 일월면과 수비면의 원시림도 육십년대를 앞뒤로 하여 나무를 몰래 마구 베어내어 본디 모습이 크게 다쳤다. 일월산의 울창한 산림이 벌채된 뒤에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영양천은 비가 오면 홍수가 지고 가볼 때면 밨가 마른 내로 변할 만큼 수원이 메말라 버렸다. 오십년 대까지만 해도 이 냇물은 “일월산 인삼 썩은 물”이라 하면서 그냥 먹는 물로 사용되었었고 영양읍을 가로지르는 황룡천도 언제나 물이 맑아 잉어, 메기, 뱀장어가 살았었다. 그러나 영양군은 지금도 임산 자원이 도 안에서는 다른 군을 훨씬 앞지른다.
이 군에서 나는 제목은 소나무가 대부분이고 소나무로서도 황장목이 유명했다.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에 썼던 질 좋은 이 황장목은 수비면에 있는 돌산인 불길산에서만 나는데 속이 누렇고 나무의 질이 단단하지만 생산량은 보잘 것이 없다. 영양군은 농가의 생활필수품인 숫돌이 많이 나는 고장이다. 청기면 산운동과 일월면 가곡동에서 주로 나는 이 숫돌은 언제부터 이곳에서 나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오래 전부터 이곳 숫돌이 나라 안에 퍼져나가 많을 때는 한해에 오만 개를 생산했다고 한다. 1968년에 영양읍 화천동을 중심으로 하여 매장량이 일억 통으로 추정되는 세계적인 규모의 동광이 발견됐다고 하여 한때 세상의 눈길을 모았었다. 그러나 국립지질 조사소가 여섯해에 걸쳐 탐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1968년에는 1차 시추까지 끝냈으나 조사가 더 진전됨이 없이 중단 상태에 있다.
아뭏든 「동국 여지 승람」에 기록된 영양군의 특산물은 구리, 납, 인삼, 송이, 벌꿀이고 「영양읍지」는 이 밖에도 담배와 고추뿐만이 아니라 대추 따위를 특산물로 들었다.
- 담당
- 농림관광국 문화관광과 관광진흥팀
- 담당자명
- 김동주
- 담당전화번호
- 054-680-6412
- 최근업데이트 :
- 2017.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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