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에서만 볼 수 있는 풍자 한마당, 익살과 폭소 그리고 어울림
영양원놀음
영양원놀음은 400여년 전부터 영양 지역에 전승되어 온 우리나라 최최의 전통 전래 마당극이다. 주로 농한기를 이용해 마을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루를 즐기면서 노는 관아 재판극이며 풍자놀음이다. 마을 주민 중 학식깨나 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정하고 그 이하 육방관속, 통인, 사령, 관노 등 여러가지 배역을 정해 죄인을 익살맞게 다스렸고 죄인은 전국으로 죄값을 치루었다. 이때 모인 전곡은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쓰였다.
마을의 풍년 농사와 안녕을 비는 세시 행사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웃 마을과 함께 어울리는 흥겨운 잔치가 되기도 했다. 비리 고발, 패륜아 추방, 상호 부조 등 권선징악의 내용이 폭소와 어우러져 묘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놀이다.
연희 시기와 장소
등장인물과 의상
등장인물은 조선조 하위 관아 소속원, 즉 원[수령, 군수, 현감] 이하 향리를 등장인물로 적당히 배역하되 참가인원에 따라 원과 육방 관속(官屬)만 배역하는 수도 있고, 인원이 소수일 때는 원과 이방, 형방, 나졸, 사령 정도로서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대가 되는 집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범법자 내지 피의자로 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완전구성일 때는 군수 이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과 통인 2명, 수명의 사령관노, 관비, 일수, 수청기생[여장]에 이르기까지 문란하고 타락한 조선조 후기 관사를 그대로 모방?구성하기 위하여 단위부락 청장년이 총동원되었다. 그보다 더욱 대규모일때는 악공이 동원되고, 풍악을 울리며 나아가면 군수 행차의 위도가 엄숙했으며 벽제소리가 온 부락에 들렸다고 한다. 서기1990년에 마지막으로 상연되었을 때는 일월면 주곡동 및 도계동의 30대, 40대의 청장년 60여명이 동원되었고 풍악을 위하여 악공을 하느라 무척 고심했다 한다. 풍악은 대체로 농악을 위주로 삼았고 날나리는 불 수 있었으나 라입(喇?)을 불 자가 없어 관속을 데려다 불게 했으며, 사령구실을 잘 할 자가 없어서 실물 사령을 1명을 고용하였다 한다.
조선조의 관직은 고려의 관직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특히 각 고을의 원[사령]은 정직(正職)이었다. 그러나 아전이라 불리는 향리는 정직의 보조 또는 서역으로서 세습직이었다. 물론 국가로부터 아무런 녹도 받지 못했으므로 서민에 대한 착취와 억압, 농민에 대한 횡포는 농촌 청장년들에게는 일대 공포였으며 그 으리으리한 관권(官權)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 일종의 야외극적인 민중놀이들이 주로 천민이나 상민층이 주가 되어 연행하였고 양반계급은 관람조차 엄금하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 ‘원놀음'은 양반출신농민이 주최가 되었고 상당한 식자가 없으면 참여할 수 없었으니 배역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일월면 주곡동 한양조씨의 집단부락으로 우리나라 명문화족이 도사린 어려운 부락으로 지금도 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부락 단위의 유오(遊娛)에 지나지 않던 시절에는 배역이 각기 착용하고 있는 그대로의 의복으로 음성만 위엄을 내어 상연했으나 1899년과 1990년에 크게 연행되었을 때는 수령과 관속의 복장을 그대로 본떠 착용하고 부족분은 향리에게 빌려 착용하였다 한다. 여장한 기생은 화장을 하였고 가발을 만들어 썼으며 실제 복장과 똑같았다고 전한다.
연희방식
‘원놀음'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중앙정부의 육조(六曹)를 모방하여 편성한 지방행정관제를 그대로 본떴다. 각방과 통인, 사령에 이르기까지 권력 분장에 따라 인원을 배치 모의하고 농가의 대청에서 상연할 때에는 원이 중앙상좌에 앉고 육방이 양측정면으로 도열하여 평소 동헌에서 행하던 하례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나중에 서술하겠지만 놀이의 주요내용은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이를 시정하는 내용보다 오히려 비행을 들추어 과(科)하는 태형이나 책벌이 주였고 수형 대신에 푸짐한 주안상을 배설하기를 요구하고 종말에는 열락으로 끝나는 것이다. 관중은 그 놀이의 과정에 있어 구사되는 용어와 언변에 감탄을 하고 당당한 제스처에 갈채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놀이는 호주 포식으로 들어가고, 계속하여 다음 차례의 집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의례히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관속은 혼비백산 도망치 않으면 안 되는 형식을 취했다. 암행어사는 미리 짜여진 배역이나 주석에 동석 했다가 파장경에 슬그머니 나가서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원래 수령은 직접 백성에 접하는 소위 근민(近民), 목민(牧民)의 관이라 하여 온갖 직능을 다 가졌었다. 주된 임무는 무엇보다 공세, 부역 등 국용의 중앙조달, 즉 민력수탈의 중앙집중을 실천한 한 기관, 한 부분 불과하였다.
‘원놀음'도 이와 같은 사실들을 모방하여 각종 비위를 들추어 그때그때 적절한 문구를 써가며 남을 웃기며 진행했다. 그러므로 무식한 자는 응당 할 수가 없으며 지식층에서 더욱 괄목할 만한 연희를 할 수 있었고 특히 수령 또는 관아에서 묵인 또는 협력하에 연희된 적이 종종 있는 듯하다.
1990년 장지홍 군수 재직시에 크게 상연하였는데 관아의 육방관속이 멀리 일월면 주곡동(주실마을)까지 교대로 출장하여 청장년을 지도하였고, 약2개월 동안 연습한 후 거행하였다. 당일은 풍악을 울리며 원을 앞세워 읍까지 행진하였으며 군수와 사전에 협의가 되어 있었는지라 군수는 동헌을 비워주어서 공연케 하였다. 그때 호출된 피의자는 40여명에 달하며, 현재 생존자는 없고 그 후손이 수명이 살고 있을 뿐이다.
1899年에 연희하였을 때도 많은 피해자가 속출하였으나 역시 군수의 묵인하에 행해진 것이라 부락민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한다.
유래와 전승

‘원놀음'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록은 물론 유물조차 전하는 것이 없어서 상고할 수 없었으나 유래에 대하여 영양군의 노인들은 한결 같이 다음과 같은 설화를 기억하고 있다.
조선조 영조대왕 때 사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1674~1740)가 영의정으로 재직시에 민정시찰차 어느 고을을 지나는데 때마침 처녀 세 자매가 ‘원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광좌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처녀들의 진지한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연하의 처녀가 수령이 되고 연상의 처녀는 범법자가 되었으며 가운데 처녀는 범법자의 부친을 가장하여 한창 재판이 전개되고 있었다. 수령은 호출된 범법자에게 과년하면서도 출가를 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신랄히 따진 뒤 그의 부를 호출했다. 노처녀의 부친은 국궁하여 죽을 죄를 지었음을 아뢰고 가세가 빈한하여 모씨의 장남 모야의 장손이 선풍도골이요, 근면한 청년임을 알고 있으나 준비된 포백 한 조각 없고 사위를 맞이할 방이 없다고 말했다.
수령은 다시 언성을 높여 부모된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크고 꾸짖고 신랑 현(賢)하고 신부 숙(淑)하면 되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느냐 하며 이 마을에 사는 적당한 신랑감의 이름을 불러보라 했다.
이 광경을 시종 엿본 이광좌는 즉시 그 지방의 수령을 통하여 그 자매를 모인(某人) 모민(某民)의 아들과 혼인하도록 주선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영양에는 한가한 정초가 되면 부락의 오붓한 방마다 남녀없이 ‘원놀음'이 성행되었다고 하니 이로 보면 영조 때부터 기원했다고 볼 수 있으나 야담과 같은 설화로서는 기원을 잡을 수 없다.
다만 확실하게 기원을 살필 수 있는 사실은 두 차례의 연행이다.
1899년 정초에 상연할 때는 강준(姜準)이란 자가 원으로 분장하여 어찌나 수령의 모방을 잘 했는지 칭찬이 자자했고, 또한 그해의 놀음 목적이 연대암(蓮台庵은 영양면 삼지이동에 소재하며 선조대 사월공 조임이 퇴임하여 서원으로 지은 것인데 지금은 불당이 되어 있다)의 보수를 위한 모금놀이였으므로 전군민이 그 후부터 그를 연대암군수(蓮台庵郡守)라고 불렀다. 1900년에는 역시 봄에 연희했으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일월면 주곡동(한양조씨 집단부락)의 유식한 청장년들이 육방관속의 직접 지도를 받아 계획된 상연을 베풀었다. 그때의 놀이 목적이 군청 청사를 건립하기 위한 전곡(錢穀)을 수집코자 군수와 밀약 끝에 실시되었다고 하나 영양군지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에 청사가 건립되었다 하니 혹 보수하기 위한 모연 공연 이었는지 모르겠다.
연희 내용
우리의 민속극 대사가 대체로 구전되어 명맥을 이었으며, 공연환경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사를 변경하거나 삽입하는 것이 많았다. ‘원놀음'도 물론 일정한 각본도 없으며 대부분 즉흥적이었으나 사전에 다소 준비는 하였다 한다. 농민의 놀이라 농업과 관가 적지 않으나 주요내용은 어디까지나 지방수령이 전제하는 행정, 군사, 사법, 조례, 부역 등의 범위 안에서 골자가 채택되었다. 하례가 끝나면 원이나 아래 이속들은 즉시 현민의 위법사실여부를 묻고 범법자를 출두케 하여 추궁하는 것인데 그 속에는 야유나 유머가 곁들어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조선조 관아의 범죄수사는 고소, 고발, 규탄, 범죄인지도 행하였으니 규문주의 자백강요로서 재판하였다. ‘원놀음'도 이를 모방하였음은 틀림없는 일이었고, 1899년과 1900년에 상연하기 위하여 군수협력하에 놀이 준비를 하였을 때는 군대의 각호가의 비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수집했다하니 민중의 아름다운 유오적 놀이가 궤에서 상당히 이탈 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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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림관광국 문화관광과 관광진흥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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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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