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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선대의 증언

작성일
2017.01.25 16:43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330
첨부파일(1)
옥선대
옥선대(玉仙臺)는 하원동과 대대천동 경계지점 산마루에 있으며, 영양읍에서 3km로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태백산맥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기복을 지으며 들어와서 하원동 동쪽에서 큰 봉우리를 이루고, 다시 영양읍으로 이어지다가 반변천에 의하여 중허리가 잘리고, 강변 양쪽에 절벽을 형성하였다. 그 동편 절벽 밑은 소가 되어 이름을 ‘옥산소(玉山沼)'라 하고, 그 절벽 위에 넓이가 두 평 가까운 평평한 석대가 있으며, 주위에 노송이 우거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 옥부선인들이 내려와 바둑을 즐기던 곳이라 하여 옥선대라 이름 지었다 하며,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옥선대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북으로 선유굴을 지나 유유히 흐르는 반변천이 대 밑으로 흘러 들어오고, 연지(蓮池)와 영혈사() 석탑이 손에 닿을 듯하며, 군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에 하나인 월담헌이 마주 보인다.동쪽으로 읍령에서 시작되는 동천을 따라 전개되는 대천들이 길게 늘어섰고, 대 밑 남쪽으로는 반변천과 동천이 합치는 곳에 삼구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옆에 비파담이 눈 아래로 보인다. 남서쪽은 반변천이 현 앞산을 돌아 흐르는 모습이 한 눈에 보이며, 서쪽으로는 반변천의 물줄기에 의하여 갈려나간 절벽은 그때의 사연을 말해주듯 솟아 있고, 그 산줄기가 삼지동과 영양읍쪽으로 이어져 있다.

옥선대는 만년을 한 자리에 앉아 대 밑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사연을 보아왔으니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행렬을 지켜보았고, 고려 때(공민왕 7년 358년)왜구가 침입 노략질하며 대앞을 지나는 모습을, 조선 때는 영해부에 예속 된 이 고장 주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오가는 모습을, 일제 때는 징용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보았으며, 6.25동란시 1950년 9월 북한 공산군이 패주할 때 대천동에 수용되었던 수많은 부상병을 그대로 방치하고 도주하였으니, 옥선대도 바로 보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해 죽은 공산군의 시체가 너무 많아 일일이 매장하지 못하고, 옥산대 밑 강가에 대마를 익히기 위하여 파 두었던 큰 구덩이에 합장하였으니, 옥선대도 바로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으리라.근년에 하원 동민의 노력으로 옥선대 밑 절벽을 허물고 다듬어 차도를 개설하여 아름다운 옛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곳 옥선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원당리에 조씨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학식과 덕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재산 또한 천석꾼이었으니, 학문을 배우고 담론하기 위하여 찾아드는 선비는 물론 지나가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을 접대하고 바라지하는 주인마님과 하녀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한다.그런데, 주인마님의 신임을 받고 다른 일꾼들을 지휘하는 늙은 하녀 한 사람이 있어 주인마님의 노고를 덜어주고, 자기들도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던 중 하루는 고승이 이 집을 찾아왔으므로 주인마님이 내어주는 시주돈을 전해주면서 자기들의 사정을 하소연 하니, 주인마님의 꾸중은 물론이고, 고승도 이 집에 사람이 많이 찾아옴은 복을 함께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조금도 괴롭다고 생각지 말고 접대하는 것이 도리라 타이르고 떠났다.

그 다음해 정초에 다시 그 고승이 찾아오니 주인마님의 지시보다 많은 시주를 하고 다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니, 마지못해 한 가지 비방을 가르쳐 주면서 “하늘의 뜻이라면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떠났다. 며칠 후, 정월 대보름날 밤에, 주인마님 몰래 마님이 사용하던 가위를 훔쳐 옥선대에 올라가 주위에 있는 노송 세 그루에 가위질한 흔적을 내었다. 그랬더니 여름 폭우가 쏟아지고 강물이 넘쳐 옥선대 앞 산맥이 끊어져 물길이 바뀌어 버렸다. 그러자 조씨 소유의 문전옥답이 자갈밭이 되었다. 그 때부터 차츰 가세가 기울고 손님이 끊어졌고, 그 많았던 남녀 일꾼들도 팔려가거나 내쫓김을 당했다 한다.

담당
농림관광국 문화관광과 관광진흥팀
담당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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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업데이트 :
2017.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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