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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민족시인

일도(一島) 오희병(吳熙秉)

오일도 시인모습

오일도(吳一島)(1901∼1946)

  • 정 의:시인(詩人), 학자(學者), 지사(志士)
  • 자 호:본명(本名)은 희병(熙秉), 아호(雅號)는 일도(一島)
  • 생 애:1901-1946 오시준(吳時俊) 칠원현감(漆原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의 둘째 아들
  • 활동사항:시원(詩苑) 창간(創刊), 시집 (오일도시(吳一島詩)), 산문집 (저녁놀)

본명은 희병(熙秉)이요 일도(一島)는 아호(雅號)이다. 오시준 칠원현감(吳時俊 漆原 縣監)의 10세손이며 오익휴(吳益休)선생의 둘째 아들로서 1901년(光武 5년) 영양면 감천동(甘川洞)에서 태어났다. 8세에 사숙(私淑)에서 6년간 한문을 수학할 때에 비범한 재질이라 성적이 우수하였다.1915년 3월 16세로서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년을 건너뛰어 1918년에 4학년을 졸업하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응시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의 입교(立敎)대학 철학부에서 학구(學究)에 정진(精進)하는 한편 시예술(詩藝術)에 심취해서 1925년 문예월간지 조선문단(朝鮮文壇) 4월호에 처녀작 [한가람 백사장(白沙場)에서]를 발표하였다. 흰 갈매기 같은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이 모여 흰 빛을 발하던 한가람(漢江) 백사장을 갈가마귀 떼가(쪽발이 왜놈들) 차지했으니 한민족(韓民族)의 한(恨)이 서린 영탄(詠嘆)은 다음과 같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 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依舊)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192년에 근화학교[槿花學校 德成女中高의 前身]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었다. 1935년 2월 사재(私財)를 기울여 순수시지(純粹時誌) 시원(詩苑)을 창간(創刊)하여 조선문단의 시인들을 총망라(總網羅)하다시피 한 시 작품 발표기관의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시단에 끼친바 영향(影響)이 크다. 1936년에는 시원사(詩苑社)에서, ≪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을 발간하였으며, 작고(作故)한 약관시인(弱冠詩人)의 ≪세림시집(世林詩集≫(21세에 요절(夭折)한 趙東振 遺詩集)을 발간하여 고향 후배 시인에 대한 애절(哀切)한 정회(情懷)를 서문(序文)에 옮기기도 했다. 그 선후배 이미 이승을 떠난 지 오래며, 세림의 아우 지훈(芝熏)마저 떠난 지 십여 년이라 인생 무상함이 하염없어라. 오일도(吳一島)시를 순수 서정시(純粹 抒情詩)라 일러, 황량(荒凉)과 조락(凋落)이 주조(主調)를 이룬 그의 시엔 민족의 얼과 정과 한(恨)이 스민 민족시인이기도 하다. [올빼미] 가운데 “한낮에도 광명(光明)을 등진 반역(反逆)의 슬픈 유족(遺族), 오오 올빼미여! 자유(自由)는 이 땅에서 빼앗긴지 오래였나니” 그러나, 흑암같은 절망이 있을 수 없는 선생의 시는 예언자(豫言者)처럼 소리 높여 읊었다.

“여름 긴긴 해 울로(鬱怒)의 하루가 저물면, 세상이 다 자는 너 대기(待機)의 밤은 이제 오리니. 쭈구린 날개를 펴고 창공을 향하여 바람같이 번개같이 밤을 일지 말아라” 저항시인(抵抗詩人)의 면목이 약여(躍如)한 선생은 현대시(現代詩)의 시인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한시(漢詩)는 한결 높이와 깊이가 있다. [징용차를 보내며(送徵用車)]의 전반(前半)에 “나의 집은 한길 가 아침 저녁으로 수레가 잇닫는다. 보내고 또 보내는 눈물 어이 끝나리. 언제 돌아오나 물으면 대답은 아득할 뿐(吾家大路邊 朝暮車連綿 送送淚何盡 歸期問杳然)”이라는 시는 가혹(苛酷)한 전쟁 시기에 왜정(倭政)의 징용을 당해 정든 고장을 떠나가는 겨레의 돌아올 날 묘연(杳然)함을 암울(暗鬱)한 심정으로 읊은 시다. [형님께 부침](서예가 吳熙台)이라는 동기(同氣)간의 애절한 정이 서린 장시(長詩)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나 어찌 부득이한 몸이 되어 하늘가에 아득한 기인 나그네 신세 근역강산(槿域江山)의 흑암(黑暗)을 통곡하노니 아아 천추(千秋)에 호소할 곳 없어라.(奈我不得身 天涯作長旅 痛哭山河暗 千秋訴無處)” 이 싱에서는 나라 잃은 채 민족의 절개를 지키자니 쫓기는 신세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함이 후인(後人)들의 가슴을 울린다.

  • 오일도 시비-저녁놀
  • 바람이 붑니다
  • 봄비
  • 눈이여 어서 나려다오

선생은 낭만주의 시인이며 민족주의 시인임과 아울러 철학을 전공한 만큼 종교 철학적인 경건(敬虔)한 시를 읊었다. “성의(聖衣)의 자라처럼 침묵(沈默)이 무거운 송원(松園)의 밤. 마을은 백양(白羊)의 꿈속에 잠기고 배개인 모래 밭 맨발이 죄스러워(…)경건(敬虔)한 기도(祈禱)에 처녀는 머리칼하나 흔들리지 않는다” 또 [별] 이라는 짧은 시에는 “가지 사이에 별이 보인다. 千年萬年 예지(叡智)에 찬 눈. 우주(宇宙)는 영원(永遠)히 멸망(滅亡) 않으리!” 마치 성시(聖時)를 대하는 느낌이다.

오일도 시인의 고매(高邁)한 정신과 올곧은 절개는 끝내 변함이 없었다. 왜정말기(倭政末期)에 조선문인들 대다수(大多數)가 회유(懷柔) 또는 억압(抑壓)당함으로써 왜정(倭政)에 부동(附同)하는 친일문인(親日文人)으로 변조(變造)되었으니, 그들중엔 마치 갈보와 같이 교태(嬌態)부리며 무문곡필을 농간(弄奸)하여 일본제국주의에 아부(阿附)하는 요사(妖邪)스러운 문인도 있었건만.

해방후 1966년 임종국(林鍾國)의 친일문학론(親日文學論)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그 가운데 너무나 많은 친일명사와 친일 무사들의 이름이 즐비(櫛比)하건만, 오일도시인의 그림자 조차 없으니 이역(異域)만리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왜추(矮醜)앞에 굴종(屈從)하지 않은 절개있는 선비이기도 하다.·15 직후 민족반역인 좌익분자들이 광복 조국을 어지럽힐 때에 구국〔救國)의 뜻을 품은 선생은 민족 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했으나 이듬해인 1946년에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 28일 맏아들의 가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46세의 애석한 나이였다. 작고(作故) 후에 발간한 ≪오일도시(吳一島詩)≫와 산문집(散文集) ≪저녁놀≫의 표제(表題)가 상징하는바 “이 우주에 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을 타고 나는 간다.” 아아! 아름다운 저녁놀을 타고 내 고장 출신의 시인 오일도 선생은 떠난 지 이미 오래나 님의 선비다운 인품과 예술은 길이 빛나리라.

오일도 오일도의시

by nc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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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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