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험 살다간 젊은 독립투사, 그 순결한 영혼의 안식처
엄순봉과 옥산마을
삼구정(英陽三龜亭)
삼구정(英陽三龜亭)
엄순봉의사기적비
엄순봉(嚴舜奉)
- 정 의:독립투사(獨立鬪士)
- 자 호:호(號)는 추수(秋水)요 별명(別名)은 형순(亨淳)
- 생 애:1903-1934
- 활동사항:김좌진(金佐鎭)장군의 휘하에 활약
- 상 훈: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마을 북쪽 옥산이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었는데, 옥산에는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옥산마을은 김좌진 장군을 도와 조국 광복 운동에 앞장선 추구 엄순봉 선생이 태어난 마을이다.
엄순봉 선생의 호는 추수(秋水)요 별명은 형순(亨淳)이다. 1903년 영양읍 한내 옥산리(玉山里)에서 출생하였다. 농춘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으나, 기백이 호협(豪俠)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재질이 출중하였다. 어릴 적에 만주로 옮겨서 거주했는데, 만주에서 우리 민족의 수난 당함과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치를 바라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김좌진(金佐鎭)장군의 휘하에 들어가서 청년층 막료(幕僚)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하였다. 만주에 있는 우리 민족 청년층의 단결과 자주성(自主性)을 북돋우고,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청년 부장에 선임되어 동지들의 교양과 훈련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에 만주 거류의 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 만주 사변에 일어나자 산발적(散發的)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부득이 일본군을 피하여 상해(上海)로 이동하였다. 이때는 이미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여러 선배 지도자를 잃었으며, 그 무덤을 황막한 벌판에 남겨두고 원한에 사모친 이동을 하게된 것이다. 그 후에 백정기(白貞基), 정화암(鄭華岩)과 더불어 상해로 이동하여 북경과 상해 사이를 여러 번 왕복하면서 투쟁을 쉬지 않았다. 이때에 옥관빈사건(玉觀彬事件)이라는 것이 있었다.
일찍이 1910년 12월 27일에 조선 총독인 일본 육군대장 대라우찌(時內正毅)가 압록강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경무통감 아끼이시(明石元二郞)가 조선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사전(事前)에 예방(豫防)할 계획으로, 민족 운동의 집결체로 알려진 예수교회와 신민회(新民會) 및 지명인사들이 대라우찌 총독 암살을 음모하였다는 명목(名目)으로 총검거하, 갖은 악형과 고문치사(拷問致死)하는 큰 사건이 있었으니, 그때 형벌 받은 이가 105인이므로 이를 백5인사건(百五人事件)이라 이른다. 옥관빈도 백5인사건의 1인이었는데, 여러 해 영어(囹圄)생활의 고통과 왜경의 유혹에 넘어가서, 기미 독립만세 사건 이후에 변절하여, 왜놈의 앞잡이로 상해방면에 출몰(出沒)하게 되었다. 옥관빈은 풍부한 왜놈 경찰의 금전(金錢)으로; 우리 독립투사의 활동을 자세히 살피고 돈을 뿌려 중상모략과 분열을 꾀하여, 우리 독립운동을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하였다.
이에 옥관빈의 제거(除去)를 중국 아나키스트연맹에서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그 책임자로 양여주(楊汝舟)가 지명되었다. 이때 엄순봉의사(義士)는 양여중와 협력하여 상해 법계로(法界路)에서 옥관빈을 죽여 없애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매국노(賣國奴)에게 천벌을 가하였고, 또 중국인과의 오해도 말끔이 가시었다. 1934년 3월 25일, 상해의 소위 조선거류민 회장이란 이숭로(李崇魯)를 제거키로 하였다. 이숭로한 자는 왜경의 밀정(密偵)으로 독립운동에 많은 장애가 되었다. 이숭로 제거 모의를 이규호(李圭虎)동지와 같이 하였으나, 어느날 엄의사 혼자서 거류민 회관으로 들어가는 이숭로를 붙잡아 묶어서, 그 자의 죄목(罪目)을 들추어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엄의사는 중국 경찰서에 체포 되었다가, 다시 일본공사관(日本公使舘)으로 넘어가서 경성 종로경찰서로 인계되어 갖은 고문(拷問)과 옥고를 치르고, 1934년 5월 7일에 또다시 모진 처형을 받았지만 끝까지 비밀을 누설(漏泄)하지 않았다. 1936년 3월 18일 사형(死刑) 언도를 받았으나, 추수(秋水) 선생은 이미 각오한 바 있어 상고(上告)아니하고 2년간 복역하다가, 1938년 4월 9일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이때 입회한 법무관이 유언이 있는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설령 전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적(敵)인 너희들을 통하여 유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요 너희들도 사람이니 공통(共通)된 인류애(人類愛)로서 너희들에게 일언(一言)한다. 내가 과거(過去)에 행한 바는 압박을 받고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원컨데 그대들은 가식(假飾)된 논변과 법리론(法理論)을 청산하고 참으로 인류를 정복, 피정복(피정복)이 없고 압박과 착취와 악행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인류 만대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라.” 부탁하고, 아나키스트 만세와 조선독립 만세를 3창하고 미소를 띄우며 유유(悠悠)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니 향년 36세의 한창 나이였다. 엄순봉(嚴舜奉)의사(義士)의 아호(雅號) 추수(秋水)그대로, 님의 투쟁과 살벌(殺罰)과 최후의 진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점의 사심(邪心)없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경(心境)이요 맑고 투명(透明)하기 가을 물(秋水)이니, 추수(秋水)선생은 진실로 민족 정기(民族正氣)와 평화 공영(平和共榮)의 인류애(人類愛)로 이뤄진 대인격(大人格)이요, 만인(萬人)의 귀감(귀鑑)으로 천추(千秋)에 길이 빛나리라.조국 광복 후 1963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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