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의병장의 넋이 잠든 곳
검산성
大海天地路 한바다와 천지간 넓은 세상에, 恨無一人從 나의 뒤를 좇는 자 한사람도 없음이 한스럽구나. 歸報祖宗國 구천(九天)에 돌아가서 갚으리라 나의 조국을, 無窮建我東 동방에 무궁한 어진 나라 세우리.
구한말 항일의병장 벽산 김도현 선생이 남긴 애절한 시다. 검산성은 벽산선생이 왜군과 대항하기 위해 사재로 세운 성이다. 온갖 고난에도 절개를 지켜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충효를 다한 벽산선생의 비극적인 일생이 후세에 전해진 듯 검산성과 생가는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벽산 선생은 명성황후 시해, 강제조약의 체결, 한일합병 등을 겪으며 의병 활동과 옥고를 반복하다 고향땅에 돌아와 사립 영흥학교를 세워 후세를 위한 육영사업에 힘썼다.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 부친까지 돌아가신 뒤 나라 잃은 원한과 어버이를 여윈 슬픔이 극에 달해 비장한 시를 남기고 동해바다에 투신하였다. 벽산선생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벽산 김도현 생가
벽산 김도현 생가
영양의 의병장 김도현

김도현(金道鉉)
- 정 의:충신(忠臣)
- 자 호:자(字)는 명옥(明玉), 호(號)는 벽산(碧山)
- 생 애:1852- 忠毅公 工曺判書 白材 金文起의 15세손이며 김성하(金性河) 참봉의 아들
- 활동사항:의병대장, 사립(私立)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창설
- 상 훈: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 문 집:≪벽산집(碧山集)≫ 2권
나라가 무너질 때 이를 지켜내느라 의병을 이끌고 전투를 펼치고, 나라가 무너지자 일제 앞에 결코 무릎 꿇고 살 수 없다는 뜻을 세워, 겨레에게 새롭게 일어나기를 주문하며 차디찬 동해를 밟고 순절한 겨레의 어른 벽산 김도현선생의 삶과 자취를 찾아 나선다.
관향은 김녕(金寧)이요. 자는 명옥(明玉)이며 호는 벽산(碧山)이다.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도모(圖謀)하다가 순절(殉節)한 사육신(死六臣)의 한분인 충의공(忠毅公 工曺判書 白材 金文起)의 15세손이며 김성하(金性河) 참봉의 아들로서 1852년(哲宗3年) 청기면(靑記面) 상청동(上靑洞)에서 태어났다. 출생한지 3백일 동안 울지 않으므로 모두 이상히 여겼는데 처음으로 울 때 그 소리 웅장하여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 어릴 적부터 기상(氣像)이 뛰어나고 힘이 세었으며 모래와 돌을 모아 성을 쌓고 진(陣)치는 형용을 하고 용과 범이 싸움하는 모습을 그렸으므로 조부가 기특히 여겨 귀여워하며 후일에 크게 되리라 기대하였다.
어느 날 마을 친구 아이들과 강변에서 목욕하다가 한 아이가 물속에 깊이 빠지니 여러 아이들은 달아나는데 혼자 깊은 물에 들어가서 건져낸 일도 있었다. 또 어느 아이와 힘을 겨루는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그 아이가 멀리 가서 넘어져 기절한 것 같이 되니 그 후로는 다시 힘겨룸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여러 번 오르내렸으나 나라 사정이 어지러우며 점점 그릇됨을 보고 깊이 한탄하였다.
1882년에 군란(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염려하여 정력을 기울여 춘추(春秋)와 병서(兵書)를 읽으며 포부를 기르고 수련을 쌓았다. 또한 동지 및 후배들과 더불어 매월초승에 점고회(點考會: 군사훈련)를 함에 지휘하는 규율(規律)이 엄정하였다. 1894년(甲午)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나니 선생은 사재(社財)를 기울려 동지들과 검산(劍山)에 진을 쳐서 창의도총부(倡義都總府)를 정하고 청량산에 들어가서 의병을 일으켜 출진(出陳)하였다.
1895년(乙未) 왜적이 한성(漢城)에 들어와서 8월 20일 민비(閔妃)를 시해(弑害)하였으므로 온나라가 소란하여져서 국모(國母) 복수(復讐)와 삭발(削髮) 반대(反對)를 주창(主唱)하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선생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여러 지방을 순회(巡廻)하면서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군세(軍勢)를 떨치었다. 안동 함창 선성(宣城)에서 왜병과 싸웠으나 패하고 다시 강원도 여러 곳을 누비며 싸우다가 강릉에서 일월산으로 퇴진 하였다. 이 때 왜적의 압력이 심한데 간신(奸臣)들의 농락이 있었으니 임금의 명령이라 빙자(憑藉)하여 의병들을 해산하도록 위협하였으므로 의병들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7일 동짓날 아침 일찍이 산수암(汕水岩)에 이르러 전 국민에게 유고(諭告)하라는 유서와 임절(臨節) 시(詩)를 써 두었으니 “나(我) 조선(朝鮮) 5백년 말기(末期)에 나서 울분으로 붉은 피가 간장에 가득 엉켰어라. 중년의 19년간에 모발(毛髮)이 이미 서릿발 같건만 나라 망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어버이 여읜 슬픔 또한 겹쳤어라. 옛 푸른 산위에 홀로 서서 백모로 생각해도 방략(方略)없으니 만경창파 바다만 바라보고파 초이레 동짓날 당도(當到)하였네 희고 맑은 천길 물속에 이 한몸 넉넉히 감춤직하다.(我生五百末 赤血滿腔腸 中問十九載 鬢髮老秋霜 國亡淚靡己 親沒心更傷 獨立古山碧 百計無一方 萬里欲觀海 七日當復陽 百百千丈水 足吾一身藏)” 상복(喪服)을 벗어 바위 위에 접어놓고 옷깃을 여미고 신발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 바다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었다. 기꺼이 몸을 던져 외침(外侵)으로 더렵혀진 조국 강산을 등지고 푸른 바다의 품속에 안긴 것이다. 나룻가의 사람들이 바라보니 멀찍이 파도 가운데를 발걸음을 옮기어 들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한낮에 선생의 잠겨 들어간 곳에 서기(瑞氣)가 산수암으로 뻗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이 바로 1914년 음력 11월 7일 동짓날이니 향년 63세이다. 벽산(碧山)선생 이야말로 멀리는 노중련(魯仲連), 가까이는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도해(蹈海)와 다를바 없는 것이다. 벽산 김도현(碧山 金道鉉)선생은 진실로 문무(文武) 쌍전(雙全)한 재질과 충효양전(忠孝兩全)한 덕행으로 민족천추의 사표(師表)이며 귀감(龜鑑)이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이 추서 되었다. 1973년 5월 24일 벽산 선생 기념 사업회 주최로 도해단(蹈海壇) 제막 및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벽산집(碧山集) 2권이 있으며, 고종 황제께서 내리신 삼인검(三寅劍)과 칙지(勅旨)와 밀지(密旨)등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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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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