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판 달리던 독립군의 어머니 고향마을에서 안식을 찾다
남자현과 지경마을

남자현(南慈賢)
- 정 의:독립운동가
- 생 애:1872-1934 남정한(南廷漢)선생의 둘째 딸
- 활동사항:기미년 3ㆍ1운동에 참가하고, 농촌의 개발(開發)과 계몽에 노력하고, 일본 육군대장 무등신의(武藤信義)를 만주국 전국일인 3월 1일에 폭살(爆殺)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옥살이를 함
- 상 훈: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여사는 남정한(南廷漢)선생의 둘째 딸로서 1872년(高宗 9年) 석보면 지경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단정하고 재질이 빼어나서, 7세에 이미 국문에 능통하고, 8세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한문을 배워 글을 지을 만큼 성적이 우수하였다. 19세에 같은 동리에 거주하는 의성김씨 김병주(金炳周)에게 출가하였다.
시부모께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에게 순종하고 부공(婦工)에 착실하였으므로, 진보(眞寶)에서 효부의 표창을 받았었다.
당시 한말(韓末)의 나라 다스림이 어지럽고,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1895년(乙未) 왜병이 민비(閔妃)를 시해하고 분란을 일으키므로,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원하려고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었다. 여사(女史)의 남편도 의병으로서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상부(喪夫)한 후에 수비면 계동(桂洞)으로 이사하여, 가난한 살림살이에 여사는 손수 길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3대 독자이며 유복자(遺腹子)인 어린 아들 영달(英達)을 키웠다. 기미년 3?1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이때가 여사의 나이 47세였다. 여사는 일본경찰의 지명수배(指名手配)를 피해 망명(亡命) 하였다. 여기서 부군의 친족인 일송(一松) 김동삼과 함께 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적(籍)을 둔 여사는 독립운동을 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그리고 한교(韓僑)의 농촌을 돌아다니며 농촌의 개발(開發)과 계몽에 노력하는 한편 동포들에게 조국 독립의 얼을 일깨우며, 북만주 일대 12곳에 예수교회를 창설하여 복음을 전도하기도 하고, 10여개소의 여성 교육기관을 세워 여성계몽과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5년 이청산(李靑山)과 함께 재등총독(齋藤總督)을 암살하기로 모의(謀議)하고, 귀국하여 서울 시내 혜화동에 잠복(潛伏)하여 있다가 미수(未遂)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탈출(脫出)하였다.
여사는 길림(吉林)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 운동 단체의 통합(統合)에 노력하여 기밀 통신과 연락 사무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에 이미 만주에 있는 왜경은 우리 독립 운동 기관에 대한 정찰(偵察)을 강화(强化)하여, 사람들의 왕래와 행동을 철저히 감시 했으나, 우리 동포의 부녀자에 대하여는 감시가 허술하였다. 여사는 이를 기화(奇貨)로 생각하고 옷차림을 남루하게 가장(假裝)하여, 북만주의 매서운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혹독한 추위와 삼복(三伏)의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수 천리 길을 걸어 10여년을 하루같이 굽힘없이 조국 광복을 위해 악전고투 하였다. 1928년 안창호(安昌浩), 김동삼(金東三) 등 37명의 동지가 중국 경찰에 잡히자, 여사는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하고 끝내 석방(釋放)운동에 성공한 일도 있었다. 1932년에 상해사변(上海事變)이 일어났다.
남자현지사 항일순국비
- 상해사변의 진상(眞相)을 조사하러 국제연맹의 조사단 릿튼경(卿) 일행이 하얼빈에 왔을 때에, 여사는 왼손 무명지 마디를 잘라 흰 천에 ‘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血書)를 쓴 후에 자른 손가락을 싸서 함께 조사단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국제연맹에 호소한 장거(壯擧)였다. 1933년은 일본 군대가 만주를 석권(席捲)하고 만주국 정부를 수립하던 해다. 이 때 만주국 전권 대사로 일본 육군대장 무등신의(武藤信義)가 관동군 사령관을 겸하여 신경(新京)에 주재(駐在)할 때이다. 여사가 일본 대사 무등신의를 만주국 전국일인 3월 1일에 폭살(爆殺)할 계획으로, 중국인 늙은 거지 차림으로 변장하여 하얼빈에 가서 폭탄을 구하여 치마 밑에 숨기고, 대낮에 신경(新京)에 와서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다가 거사 직전(擧事直前)에 밀정(密偵)의 밀고(密告)로 인하여 왜놈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본 영사과에 구금되어 5개월간 갖은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며, 하얼빈 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왜경의 음식 차입을 일체 거절하고 말하기를 “원수 도적을 토살(討殺)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잡혔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라”하고, 단식투쟁 15일 만에 거의 죽은 몸이 되어 병보석(炳保釋)으로 출감하였다. 출감 후 혹독한 형벌로 인해 끝내 목숨을 부지(扶持)할 수 없었다. 여사는 하얼빈시내 조선여관(朝鮮旅館)에서 파란 많은 일생을 마치니 향년 62세이었다. 한국인교포들이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사회장(社會葬)을 하고 사당(祠堂)을 짓고 비(裨)를 세웠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하여 남자현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념하였으며, 영양군은 1999년 생가를 복원하여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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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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