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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1943

자아확립,갈등

Jihun's biography

동양의 깊은 정신 세계와 접촉하다

동양의 깊은 정신세계와 접촉하며 식민정책에 통곡, 암울한 시대 속에서 방랑적 정서 노래

'스물두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학교를 마치자 곧 오대산 월정사로 가게 되었다....(중략)... 불교강원의 외전강사란 이름으로 스물두 살짜리의 백면의 서생은 주지와 조실의 다음 자리에 앉아 가승 노릇으로 1년을 보냈다. 자기 침잠의 공부에 들었던 그 1년은 나의 시에 한 시기를 그은 것이 사실이요, 그만큼 나의 생애에 주요한 도정이기도 하였다. 나의 시가 지닌 바 기교주의는 선으로부터 오는 무기교주의로써 지양되었고 주지(主知)의 미학은 자연과의 교감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금강경오가해」와 「화엄경」에 경도하고 「전등록」과 「염송」을 탐독하고 절의 서고에 있는 노장(老莊)과 스피노자와 헤겔, 베르그송을 조금 읽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마을」,「달밤」,「고사」,「산방」계열이 절에서 지은 작품들이니, 주로 서경의 자연시 - 슬프지 않은 시 몇편은 이 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발레리, 릴케, 헤세를 집어치우고 다시 당시(唐詩)를 읽고 한산시(寒山詩)를 비롯한 선가어록과 게송을 좋아한 것이 그 때의 나의 생활이었다.

학상시절 교복을 입은 조지훈

일제의 식민정책에 통곡하다

「봉황수」로 추천받은 해 지훈은 김위남과 결혼을 하고 다음해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1941년)에 오대산월정사 불교강원 외전강사로 취임한 지훈은 학승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문학교육과 선(禪)의 수행을 가르치고 배웠다. 지훈은 술과 나물만 먹는 생활 속에서 뼈만 남은 몸이 되어 시를 짓고 독서를 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독서와 사색, 자연과의 대화를 통한 월정사에서의 생활은 그 해 가을에 접어들면서 막을 내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문장」지를 폐간하고, 산사에 있는 그의 서실까지 수색하였다. 또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지훈은 술에 대취하여 목을 놓아 크게 울었으며 결국은 졸도하였다. 별고 소식을 듣고 내려온 아버지를 따라 지훈은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그는 「암혈의 노래」,「비혈기」등을 지었다.

자아갈등기(1942~1943)

암울한 시대 속에서 방랑적 정서 노래하다

'서울에 돌아와 요양하다가 일어난 나는 그때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기로 되었다. 자금난 때문에 진도가 지지하던 참이라, 그저 도와 드리기로 하고 날마다 점심을 싸 가지고 출근하였다. 이해 1942년 봄에 나는 성지순례와 같은 심정으로 경주를 다녀왔고 시우(詩友)목월을 거기서 처음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해 시월에 조선어학회의 검거가 시작되었고 그날 10월1일, 아마 왜총지부시정기념일인가 하는 날에 나는 화동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붙들려 고문을 당했다. ...(중략)...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나의 방랑시편이 나왔고 그것은 곧 산암해정(山菴海亭)사이를 떠도는 내 역정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다정다한의 하염없는 애수의 정조, 우수심성의 떠도는 그림자를 읊은 영탄조의 이 가락은 나의 생애 중 가장 잊히지 않는 절실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나의 시의 편력」(「사상계」)중에서-

스스로 붓을 꺾다

지훈은 월정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친을 따라 쇠약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다. 1941년부터 극한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한 괴로운 세월에 정신을 가누기가 어려웠고, 겨우내 닫혔던 심기가 너무 울적해서 무슨 충동에나 이끌린 듯한 심정으로 목월을 만나러 경주를 찾았다. 이때 「완화삼」을 목월에게 주고 후에 목월에게 「나그네」를 받았다. 1942년 봄부터 조선어학회의 「큰사전」편찬을 돕다가 같은 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전원이 검거되는 바람에 시골로 피신해 있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문인들은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적극 가담하였다. 지훈도 '조선문인보국회'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추천시 몇 편 발표한 것이 무슨 시인이겠느냐는 태도로 입회를 피해 스스로 붓을 꺾었다.

담당부서
농림관광국 문화관광과 문화예술팀
이다은
054-680-6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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