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과 사적지
석계고택 (石溪古宅)
조선인조, 현종때의 학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의 고택이다. 영덕군 창수면에서 출생한 석계 이시명선생은 일찍이 생원에 올랐으나 곧 입신양명의 뜻을 접고 일생을 학문연구에 바치기로 다짐하여 1640년(인조 18년) 영양군 석보면으로 이사하였으며 석계(石溪)위에 집을 짓고 석계라 자호(自號)하였다. 또한 그의 부인 정부인 장씨도 효행,부덕,학문,예술 등을 고루 갖춰 신사임당(申師任堂 )에 버금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옥은 석계선생 내외가 석보에서 살던 집으로 석계선생은 안동에서 임종하였으나 정부인 장씨는 임종할 때 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한다. 고택은 4칸 규모의 ㅡ 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ㅡ 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웠으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러 허실감(虛失感)을 메운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 지정별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
- 소재지 :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길 77 석계고택
- 지정일 : 1990년 8월 7일
- 건립년대 : 17세기 중엽 건립
석천서당
1640년(인조 18)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중대(中臺)위에 터를 잡아 석계초당(石溪草堂)을 지어 14년간 살던 곳이다. 석계선생이 20년간을 수양산에서 은거하다 1674년 안동에서 운명하자 1676년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선생이 돌아와 선업을 이어오다가 석계선생이 강학하던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다하여 1762년에 석천서당을 창건하게 되었으며, 1771년 8월에 준공하였다.서당은 두들산을 배산한 경사진 대지에 남서향 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서당고(書堂庫)에는 안릉세전(安陵世典), 석계선생문집(石溪先生文集),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 정묵제선생문집, 항제선생문집, 영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 지정별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 소재지 :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길 88
- 지정일 : 1985년 8월 5일
- 소유자 : 재령이씨 석계파 종중
- 건립년대 : 1891년 건립
기타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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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발첩(鶴髮帖)
가로 25.5㎝ x 세로44㎝이다. 10세 전후에 지었다는 학발시가 친필 초서로 쓰여 있다. 18세기 말 학자이자 정치가인 간옹 이헌경으로부터 필적이 정묘하다는 평을 들었다. 현재 목판도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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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인필첩(張夫人筆帖)
제목없는 고시와 '시생'이란 칠언율시 2편이 친필 초서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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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보첩(傳家寶帖)
가로71.5㎝ x 세로62.5㎝이다. 8면으로 되어있는데 4,5면에 상서로운 구름과 여덟마리의 용을 수놓았으므로 팔룡수첩이라고도 한다. 성인음과 소소음이 여기에 들어 있는데, 부군 석계 이시명이 직접쓰고 둘째 며느리 박씨가 수를 놓았다고 한다. 7면에는 경신음, 기아손, 희우희 3편이 붓으로 쓰여 있으며, 5대손 이우표가 현재와 같은 시첩으로 꾸몄다. 18세기 말 남인 계열 학자인 이헌경과 목만중이 이를 찬탄해서 쓴 발문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 최근업데이트
- 2019.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