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인물

석계 이시명

작성일
2018.03.27 14:13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611
선조23년(1590)~현종15년(1674). 운악(雲嶽) 이함(李涵)선생의 셋째아들로, 자는 회숙(晦叔), 호는 석계(石溪) 영해 인량리 출신 조선시대 학자이자 문인. 12, 13세 때에는 조부를 따라 서울에서 수학하고 부친이 의령현감에 부임할 때 소년으로서 따라갔는데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佑)로부터 절조를 숭상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다는 평을 들었다.

경당 장흥효선생의 딸인 장계향과 결혼하여 경당선생과 함께 경서의 뜻을 논의하였으며 퇴계선생의 도학을 일찍부터 알아 그 방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1612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40여일간 고립이 되고 삼전도(현, 서울송파)에서 굴욕적인 화의를 맺자 비분강개 하여 과업을 폐하고 이듬해(1637) 어머니를 모시고 운악선생의 산소가 있는 한밭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강릉참봉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인조 18년(1640)에 영양군 석보로 들어가 석계(石溪)위에 집을 짓고 석계(石溪)라 하였다.

인조 22년(1644)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인량으로 돌아가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석보로 갔다가 효종 4년(1653)에 영양 수비산 속으로 들어가 유거기(幽居記)를 지어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 뒤 20년이 지난 현종 13년(1672)에 자손의 성장과 진취를 생각하여 다시 안동 도솔원으로 옮겼다.

당시 청렴강직하고 도덕과 학문이 높은 재상이었던 용주(龍洲) 조경(趙絅)은 이시명에게 <온 집이 녹문(鹿門)에 들어감을 들었는데 이제 그 사람을 보았으며 또 순씨(筍氏)의 팔용(八龍)이 있어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받으니 이것은 덕공(德公)에게는 없었던 것이 공에게는 이것이 있다>고 하였다. 석계 이시명은 안동으로 돌아온지 3년만에 향년 85세로 타계하였다. 뒤에 갈암 이현일의 현달로 이조판서에 추정되었다. 석계선생문집 3책이 전한다.

본페이지의 담당부서는 문화체험교육담당 문화시설사업소 (054-680-6440) 입니다.
최근업데이트
2018.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