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인물

이현규

작성일
2018.03.27 14:10
등록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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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11년(1874~1917). 휘는 현규(鉉圭)요, 자는 하현(夏玄), 호는 내산(奈山)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행 되어 국권이 박탈당하자 33세로 동지 수십인과 함께 각지로 통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하고 청송 주왕산에 모여 창의할 것을 결의 하고 그해(1905) 12월 중순 울진 불영사에서 안동, 영양, 청송, 진보 등지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의거토적할 것을 결의했는데, 이때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과 무기 및 군자금을 모았으며 한달만에 의병의 수는 5백여명에 이르렀다.

의병을 청송 주왕산과 안동 청량산에 집결시켜 밤낮으로 맹훈을 강행했으며, 1906년 2월에 영양군 입암에서 의진을 편성하였는데, 중군장에 류시연, 소모장에 신형일, 도포장에 김대규, 도포수에 권대성, 집사에 조완이 등을 각각 임명하고 출격하여 일본군과 수십회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해 (1906) 4월에 진보 속칭(오누地) 전투에서 당시 경상, 강원양도 의병 소탕 주력부대인 일헌병오장 무등 부대와 치열한 접전 끝에 견디다 못한 일병이 패주하자 전세를 몰아 청송군 파천면 어천동까지 추격하여 대장 무등 등 10여병의 일병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집사 조완이가 전사하고 이현규도 부상을 입었다.

그해 5월에 울진군 죽변항의 왜관을 격파하고 이어 영양군 일월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군을 습격하였으나 일병 지원부대의 반격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도포장 김대규 등 많은 동지를 잃게 되자 부득이 퇴진하여 뒷날 재기를 약속하고 의진을 해산시켰다. 일군은 이현규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수배하고 또 자수를 권하면서 관직을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그를 염려한 한 동지가 자수할 것을 권하자 크게 꾸짖으면서 <제(齊) 나라의 전횡(田橫)과 같은 의로운 죽음은 할지언정 한(漢) 나라의 위율(衛律)과 같이 더럽게 살지는 않겠다>하고 그 길로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로 몸을 피하여 상처를 치료하는 한편 서당에서 후진교육에 전심(傳心)하면서 항일구국운동을 재기하고자 하였으나 총상의 여독으로 불혹을 갖 넘은 4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64년 11월에 경북독립유공선열유족회와 내산이하현의사기념사업회에서 청송군 진보면 진안동 오누지, 길 옆에 [의사내산이하현선생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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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7